추억은 봄이 되고

일 메그에 봄이 찾아왔다. 영원불변의 무지개의 나라에 계절 변화가 웬말이냐하면, 요정들이 유난히도 애정하는 인간 한 사람의 방문을 환영하는 뜻이라고 설명한다. 픽시들의 시선에 인간은 불쌍하게도 덧없는 삶을 즐길 줄도 모르고 무의미한 것들에 집착하여 결국 풍파에 스러지는 한때의 존재. 그러나 그 중에서도 제1세계를 구원한 어둠의 전사는 특별했다. 100년의 고통에서 옛 요정왕을 해방시켜 준 자. 새로운 요정왕에게 간택 받은 자. 그 사람 랜슬롯은 차례차례 시련을 극복해 변덕스럽고 장난스러운 픽시들에게마저 불변의 우애를 손에 얻었다. 그게 오늘의 계절을 불러들였으니 일 메그는 인간만이 모르는 봄 축제의 향연에 흠뻑 젖은 것이다.

랜슬롯은 레이크랜드에서 이어지는 연보라빛 꽃잎이 카펫처럼 만개한 언덕을 둘러보면서 일견 정직하게 반짝이는 푸른 눈을 크게 떴다. 상쾌한 바람이 불어와 랜슬롯의 밀빛 금발을 쓰다듬고 지나갔다. 반면 그의 곁을 지키는 아르버트의 짧은 밤색 머리칼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으니. 아무리 요정의 마법이 깃든 바람이라 할 지라도, 같은 영혼에서 떨어져 나온 조각으로서 두 사람의 운명이 더없이 묶이고 엮인 덕으로 간신히 형체를 유지할 수 있는 아르버트에게 그 바람이 닿을 방도는 없었던 모양이다.

아르버트가 공기처럼 가볍게 몇 걸음 앞으로 나아가 언덕 아래의 들판을 내려다봤다. 그곳엔 또 다른 색채의 꽃망울들이 남김없이 알록달록 피어올라 바람이 불 때마다 달큰한 꽃향기를 뻗어내고 있었다. 마법에 취한 나비가 꿀을 빨고 야생 곰이 풀숲에 굴러 등을 비볐다. 아르버트의 입술이 벙긋 벌어져 미소가 번졌다.

“이런…… 이곳이 이렇게…… 처음 봐.”

겨우 몇 년 전이었다. 무엇과, 누구와, 세계 자체와 연결 고리를 잃고, 존재 의미도 잃은 채로 무작정 곳곳을 떠돌아다녔던 그때. 아르버트는 불길한 빛으로 침잠한 일 메그에 들른 적이 있다. 랜슬롯이 제1세계에 발을 디디지 않았던 그때는 들꽃에 빛 속성 에테르가 포화되어 점점이 하얗게 썩어서 픽시들이 한탄했던 것이 어렴풋하다.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그야말로 지상 낙원에 비할 수 있을 지 않을까. 아르버트가 사랑하는 고향땅이 점차 치유되고 있다는 증거인 것만 같아서 이제는 없는 심장이 뭉클했다.

“갈까?”

불쑥, 랜슬롯이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에스코트를 신청하듯 감상에 젖은 아르버트에게 손을 뻗었다. 아르버트는 눈을 깜빡거리다가 픽 웃고는 그의 손을 잡았다. 그제서야 그의 발걸음에 무게가 생기고 풀이 짓밟혀 두 사람 분의 꽃길을 만들어냈다. 멀리 나아가는 그들을 지켜보면서 풀숲에 숨어 있던 픽시들이 장난에 굶주린 손을 씰룩거리고 날개를 팔랑거렸다.

장난에 굶주린 것은 픽시만이 아니었다. 랜슬롯은 아르버트와 잡은 손을 꼼지락거리다가 금속 건틀릿을 낀 손을 짐승 아가리처럼 쩍 벌려서 가죽 장갑을 낀 그의 손을 통째로 감싸 쥐었다. 아르버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반사적으로 주먹을 잠깐 쥐었다가, 이내 힘을 풀고 그에게 손을 맡겼다.

높은 언덕을 내려온 랜슬롯과 아르버트는 말이라도 맞춘 것처럼 자연스럽게 마물을 피해 멀리 돌아가는 길을 선택했다. 자기 방위의 차원이더라도 이 아름다운 정경에 피 얼룩을 묻히는 건 내키지 않아서였다. 랜슬롯의 경우는 여러 실리를 고려한 행동이었지만.

꽃밭을 헤쳐 나가는 내내 지독하게도 달콤한 향기는 갑옷 구석구석 밸 정도였다. 랜슬롯은 말없이 머리를 굴려 계산했다. 그가 사랑하는 아르버트를 품안에 가득 껴안았을 때 과연 이 향기 자국이 그를 현혹시킬 수 있을 것인지. 가능성은 꽤 높았다. 그러나 당장 안고 싶다고, 또는 안아 달라고 강청하기엔 상황이 애매한 건 사실이었다. 랜슬롯 나름대로도 평화로운 들판 산책이 싫지 않았다. 우주의 명운을 건 싸움을 거친 뒤에는 특히 그랬다. 이대로 평화를 즐겨 보자. 랜슬롯은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옛날에 푀부트 왕국에서는 말이야.”

아르버트는 대체로 자신의 이야기는 잘 하지 않는 편이었다. 자신은 이미 오래 전에 죽은 몸이고, 분명 오래 지나지 않아 사라질 몸이며, 이미 사라진 과거를 말해 봐야 그때 그곳을 살았던 자가 아닌 이상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가 품에 안고 사는 소중한 동료들을 기리는 마음과 감정을 이해할 수 있는 세상 유일한 사람이 있다면, 어둠의 전사라는 이중적인 이명을 공유하고 있는 랜슬롯뿐이었다. 만일 아르버트가 다른 사람과 자유롭게 말을 나눌 수 있었더라도, 이런 이야기는 오직 랜슬롯에게만 털어놨으리라. 오랜 교제로 그 사실을 훤히 알고 있는 랜슬롯은 아르버트가 입을 떼려는 지금도 못내 기뻤다.

“별빛 2월에 처음 비가 오는 날을 봄이 시작되는 날이라고 했거든.”

그는 고개를 돌려 호숫가를 바라봤다. 거울 호수 아래에 깊이 잠긴 푀부트 양식 저택들이 수면 밖에 지붕만을 비쭉 드러내어 100년 전에 분명 사람이 살았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 시절 사람들은 봄이 오면 지붕에 장식을 달아 놓았다. 성장과 번영을 바라는 마음을 담아 정삼각형 나무 조각을 새끼줄에 꼬아서 둘둘 매다는 것이다. 그리고 비가 오면 나무 조각이 서로 부딪혀 달각달각 소리를 냈다. 그게 봄이 오는 소리다. 비가 오는 소리를 음악 삼아서 사람들은 실내에 모여 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다. 이러한 풍습을 되새기는 아르버트의 눈이 부드럽게 가늘어졌다. 랜슬롯은 잠자코 그의 얼굴을 살폈다.

“재밌는 점은, 첫 비가 내리는 날에 마을에 타지인이 방문하면 그 사람을 ‘봄을 불러오는 객’ 이라고 해서 엄청나게 환대한다는 거야.”

하핫. 아르버트는 그날을 생각하면 어김없이 웃음이 터져 나왔다. 폭우가 내리던 밤이었다. 돈이 똑 떨어지는 바람에 야영을 계획했던 아르버트 일행은 느닷없이 일기예보에 없던 소나기가 쏟아져 몹시 당황했던 적이 있었다. 이 지역은 100년 전에도 몸을 숨길 만한 동굴의 동굴은 커녕 어디 높은 나무조차 흔치 않은 맨들판이어서, 물에 빠진 생쥐 꼴을 면할 수 없었는데. 별수없이 숙소는 못 구해도 처마 밑에 비를 피하기라도 하고자 마을로 향했던 아르버트네였다. 푀부트 왕국의 봄 풍습을 알게 된 건 그때였다.

“누가 이러는 거야. ‘올해도 봄이 왔다!’ 그러니까 온 동네 현관문이 덜컥덜컥 열리면서 죄 소리를 지르는데. 얼마나 황당하던지.”
“흐응. 그랬구나…….”

랜슬롯은 다소 불만스럽게 입을 감쳐물고 아르버트의 표정을 계속 주시했다. 아르버트는 아직 추억에 빠져서 랜슬롯의 반응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왼손을 크게 휘저으며 말을 마저 이었다.

“그랬더니 어떻게 나왔는 줄 알아? 냅다 우리를 번쩍 들어올려서 헹가래를 하는 거야. 빗속에서!”

상상이 돼? 라고 웃으며 랜슬롯을 돌아보는 아르버트는 아차 싶은 듯이 입을 다물었다. 랜슬롯이 언짢은 기분을 숨기지도 않고 입술을 내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아르버트가 자신에게 남모를 추억 이야기를 해줘서 기뻤다. 하지만 이 정도까지 기뻐하는 것은 랜슬롯으로선 도무지 반길 수 없었다. 추억을 그리워하는 그에게 서운함을 느끼는 이유는 분명 질투였다. 아르버트가 그리워 하는 건 오로지 자신뿐이었으면 하는 질투. 형체도 없는 추상적 개념에게까지 시기하다니, 집착도 정도껏이었다. 랜슬롯 본인은 조금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 순간 쏴아하고 세찬 빗소리가 고막을 때렸다. 두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지만 하얀색 둥실 구름만 투명하게 비쳐서 높고 맑았다. 그들의 머리를 차갑게 적시는 건 분명 추억 속 그때와도 같은 소나기였는데.

“올해도 봄이 왔다!”

누군가 크게 외치는 목소리에 몸을 돌리자, 그곳에는 독특한 민소매 의장을 입은 마을 주민 한 무리가 가득 모여서 대여섯 남녀를 번쩍 들어올려 헹가래를 치고 있었다. 랜슬롯은 눈을 부릅뜨고 그 광경을 보았다. 분명 아르버트는 자신의 손 안에 잡혀 있는데, 눈앞에는 좀더 젊고 어린 아르버트가 어리버리 웃으며 허공에서 들썩거리고 있는 게 아닌가.

푀부트 왕국의 일상, 가슴이 두근거리는 모험, 동료들과 함께할 수 있는 기쁨. 아르버트는 모든 것이 생생하게 살아났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앞걸음질을 하려 했다. 그곳으로 가까이, 안으로 가까이 다가가면, 어쩌면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 지도 몰라. 그런 터무니없는 충동과 욕심이 순간적으로 솟구쳤다. 그걸 랜슬롯이 허락할 리 없었다.

그는 산크레드가 알려주었던, 픽시의 환영을 풀 수 있는 나선형 풀줄기를 집어 들고서 아르버트를 강하게 잡아당겼다. 단번에 저지당한 아르버트는 눈꼬리를 내리고 랜슬롯을 돌아보았다. 청명한 날, 정오의 하늘을 닮은 눈동자에 깊이를 알 수 없는 아픔과 슬픔이 내비쳤다. 랜슬롯은 고개를 살짝 내저었다. 그리고 수갑을 채우듯이 아르버트의 손목을 으스러지도록 꽉 쥐었다. 아르버트에게 인간다운 통각이 남아 있었다면 비명을 질렀을 지도 모른다.

아르버트도 알고 있었다. 자신이 없다면 랜슬롯은 버티지 못한다는 것을.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그가 그렇게 말했으니까. 아르버트는 즐거운 봄 축제와 랜슬롯을 번갈아 보다가 씁쓸하게 미소 지으며 랜슬롯에게 풀줄기를 건네받았다. 장난 어린 마술은 깨지고 픽시는 도망쳤다. 아르버트는 이제 아무것도 남지 않은 그 장소를 오래도록 눈에 담았다.

랜슬롯과 아르버트는 아모로들이 둥지를 튼 볼레크도르프에 가는 내내 말이 없었다. 아르버트의 어수선한 마음을 손 수갑이 가라앉혀 주기에는 역부족이었던 모양이다. 그가 상념에서 빠져나온 것은 고지대 나무에 열린 픽시 사과를 봤을 때였다. 아르버트는 랜슬롯에게 붙잡힌 오른손을 들어올려서, 시간을 거쳐 빨갛게 잘 익은 사과를 뚝 따서 랜슬롯에게 건네줬다. 랜슬롯은 울 것 같은 미소를 지으며 그것을 받았다.

“세토.”
“아르버트. 다시 와 줬구나.”

소중하디 소중한 동료를 아르버트가 정성껏 쓰다듬었다. 랜슬롯의 입을 빌려 많은 이야기를 전했다. 차원을 넘어 새로운 세계로 모험을 떠났던 이야기. 어둠의 심복과 맞서 싸운 이야기. 종말을 막기 위해 우주로 나아간 이야기. 절망의 노래를 희망의 노래로 바꾸어 들은 이야기. 세토는 눈을 감고서 단 한마디도 흘려듣지 않겠다는 듯이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마침내 만족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 됐다, 아르버트. 너는 지금을 살고 있구나.”

그는 세토를 어루만지던 손을 움찔 멈췄다가, 문득 ‘아’ 하고 짧게 신음을 흘리고는 작게 웃었다.

“그러네. 그런 거네.”

아르버트는 랜슬롯을 바라봤다. 랜슬롯은 아르버트를 마주봤다. 푸른 눈동자 두 쌍이 초승달 모양으로 빙긋 굽었다.